오늘은 정기 검진일이다.
“별일 없으셨지요? 약은 잘 드셨나요?”
“예,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최근에 운동을 하면 약간 멍한 느낌입니다.”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운동 중에 물을 많이 마시고 운동 후에는 좀 쉬어주세요.”
“약은 언제까지 먹어야 하나요?”
선생님은 아스피린과 리피로우를 약의 부작용보다는 뇌졸중 예방을 위해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한다. 힘이 쭉 빠졌다. 지난 6년 동안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젠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니 막막한 느낌이다. 6년 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선생님은 아스피린과 리피로우를 약의 부작용보다는 뇌졸중 예방을 위해 평생 먹어야 한다고 한다. 힘이 쭉 빠졌다. 지난 6년 동안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이젠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니 막막한 느낌이다. 6년 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마 평생 잊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2013년 1월 11일 그날은 그해 겨울의 가장 추운 날이었다. 출근길에 오른쪽 장갑을 떨어뜨렸는데 잡을 수가 없었다. 몸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 같더니 넘어졌다. 주위의 시선이 부끄러워 벌떡 일어섰는데 다시 넘어졌다.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다. 집 근처 병원은 새벽이라 담당의사가 없어 입원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다급히 대학병원 응급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의식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상황이 무서웠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급박하게 수술실로 이동됐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동맥 내 혈관 재개통 시술이 진행되었다.
다행히 시술은 무사히 끝났고 중환자실에서 이틀 동안 치료를 받았다. 면회시간에 대구에 계시는 부모님과 서울에 있는 동생이 조금 전까지 울었던 얼굴로 나에게 다와가 애써 웃으며 금방 회복될 거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중환자실 문이 열리면 노심초사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부모님이 보였고, 나의 몸 상태가 안 좋음을 직감했다. TV 속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들이 생각났다. 이렇게 의식이 멀쩡한데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나는 괜찮은데….
이틀 동안의 중환자실 치료는 나에게는 지옥과 같은 시간이었다.
일분일초가 그렇게 길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지난 33년을 살면서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을까? 행복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 앞만 보고 달렸다. 대인관계 유지를 위해 술도 많이 마셨고, 업무 스트레스는 오로지 담배로 풀었다. 성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도 없이 남들한테 지지 않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업해서 동기들보다 더 높은 성과를 내며 승승장구했었는데 이렇게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빨리 훌훌 털고 일어나 일하러 가야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그런데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말을 하면 다들 미소 지으며 ‘괜찮아 금방 회복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좀 쉬어’라고만 했다. 가족들 외에 같이 일했던 직속상관과 제일 친한 친구 내외만 나를 보러 왔다. 정말 이상했다. 스스로 인맥도 넓고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 왔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당황스럽고, 인생 헛살았다는 생각에 절망스러웠다.
시간이 지난 후에 실어증이 생겨 의사소통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절대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병문안 금지 조치를 했고, 지인들에게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정말 감사했다.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했다. 실어증 뿐 아니라 글을 쓰지 못했다.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던 일이 생각나 의사소통이 안 되니 메모를 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그림을 그려 놓은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그때서야 제대로 인식하였다.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되고 재활치료를 해야 했다. 단어들을 보여주고 읽어 보라고 했고, 블록을 제자리에 옮겨 놓는 일과 더하기 빼기 등 2주 동안 재활치료가 진행되었다. 퇴원한 후 더 이상 재활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 내 모습이 너무 비참하고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난 33년간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고, 성공만을 위해서 달려온 나에게 지금의 몸 상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나를 지극 정성 간호하던 아내와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당장 죽고 싶었다. 내가 어떻게 죽으면 아내와 부모님에게 도움이 될까 생각했었다.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아내는 어떻게 참아 냈는지 가늠할 수 없지만 희망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니 그때까지는 아내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고 싶었다. 결혼 6년 동안 아이가 없어 고민을 했었는데 아내가 병원에 가서 인공수정 시술을 받자고 했다. 아내의 헌신이 하늘에 전달되었는지 한 달 뒤에 임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내 한복판 도로에서 나를 안고 펑펑 우는 아내의 모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그리고 출생예정일이 2014년 1월 11일, 내가 쓰러졌던 날 정확히 1년 후였다. 이건 내가 살아야하는 명백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할 뻔 했던 내 인생을 강력한 힘으로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나는 재활에 모든 것을 걸었다. 초등학교 1학년 교재를 구입하여 한글을 따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 되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무심결에 책장을 올려다보니 성경책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첫 장을 열었는데 ‘사랑하는 사위에게, 장인이’라고 쓰인 문구가 보였다. 교회의 장로이신 장인어른이 결혼식에 주셨던 성경책이었다.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달리기만 했지 가족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성경책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때부터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쪽을 읽는데 1시간 이상 걸렸다.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두 달 내내 성경책만 읽었던 것 같다. 믿음이나 깨달음이 있었다기 보다는 성경책을 일독하는 것이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회복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어느 샌가 실어증도 없어지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매일 아침 걷기운동과 수영을 했다. 천천히 가던 시간이 다시 빠르게 가기 시작했다. 출산용품을 사려고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너무 숨이 막히고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화장실로 쫓기다시피 도망쳤다. 다시 대학병원과 재활치료병원에 가보았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증상이 계속되어 주치의가 추천한 정신의학과에 갔더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다. 3개월 뒤에는 출산을 할 것이고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복직을 하였다. 복직 후에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날 괴롭혔다. 그때마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매일 아침 출근 전에 꾸준한 운동과 절제된 생활 덕에 간헐적으로 증상이 있기는 하지만 지난해부터는 정신의학과 약은 먹지 않아도 참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꾸준히 책을 읽는 것은 뇌세포를 활성화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산업대학원 석사 과정을 이수하며 학업에 열중하고 있고, 재활을 위해 책을 꾸준히 읽은 덕분인지 지난 2학기 동안 성적우수 장학금도 받았다. 성공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 달렸었는데, 지금에 와서야 성공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나는 지금을 행복하게 살고 싶다. 먼 미래를 위해 너무 아등바등 사는 것 보다는 지금 내 옆에 있는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웃을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힘겨운 재활 시간이었지만 내 인생에 덤으로 얻은 시간이라 생각하며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 영향인지 첫째가 태어난 이후 18개월 간격으로 줄줄이 아이가 태어나 지금은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그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이 행복을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까지 정기검진과 아스피린에 의존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의 임신 소식으로 내가 꼭 살아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재활을 했듯이 뇌졸중으로 고생하시는 많은 환자들도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와 재활에 최선을 다한다면 회복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 강력히 믿는다.
환자들을 위해 힘써 주시는 의사선생님 항상 감사드리며, 제 사연이 도움이 된다면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셔서 회복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