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시절 육상선수를 할 만큼 건강한 사람이었다. 또 32살의 젊은 나이였으니까 나 자신은 물론 내가 아는 그 누구도 내가 이렇게 마비된 채 반쪽인생을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누워서 콧줄로 연명하는 아픈 시기를 지나, 내 현실을 보고도 인정하기 힘들었던 가슴 시린 절망의 터널을 또 지나서, ‘어떻게 하면 더 좋아질까?’라는 질 좋은 재활을 궁리하는 지금에 까지 이르렀다. 생각해 보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참 눈물나게 질긴 세월이었다. 처음은 뇌졸중이라는 이 병이 젊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어 어떤 병인지조차 몰랐는데, 그래서 말년 운이 나쁘면 걸리는 병쯤으로 교과서적인 지식이 전부였는데, 그러나 그 병과 11년을 동고동락하는 사이 나는 지금 누구보다 마비를 잘 알고 있다. 물론 이제 절반가량 풀어 낸 내 마비지만, 머지않아 뛰어 다닐 자신도 생겼다. 나는 지금도 5시간의 뇌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보냈던 11년 전의 보름을 잊지 못한다. 죽음과도 같은 너무나 절망적인 순간들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조차 힘든 밤낮없는 고통의 시간들. 수술 후 의식없는 그 며칠을 나는 눈꺼풀이 안 감겨 뜬 눈으로 사경을 헤매었다. 수술부위가 워낙 안쪽인 숨골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절개 중에 소뇌와 여러 신경 부위들을 건드려 예후가 나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남편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표할 정도지만, ‘울면서 죽을 확률이 더 많은 수술동의서에 사인했다’는 그 말과 ‘자신만 혼자 남기고 죽는 줄 알았다’며, 내가 의식없는 동안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렇다. 나는 11년 전 숨골 혈관기형에 30cc 가량의 출혈로 인해 뇌수술을 받았다. 때문에 나는 마비의 그 정도가 심했다. 결국 머리가 다 마비되고 얼굴의 모든 기능이 멈춰 버려, 처음엔 눈물도 콧물도 흐르지 않았었다. 또 한쪽 귀는 들리지 않고, 나머지 귀는 이명이 심했으며, 얼굴 주름도 잡히지 않았다. 숨골 수술을 위해 너무 많은 신경을 건드리고 또 출혈량이 많은 것도 한 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 발병 3일만에 늦게 수술하는 바람에, 골든타임도 멀찌감치 놓쳐 버렸다. 그래서 처음 마비된 오른몸은 전혀 느낄 수가 없으니,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루 아침에 왼쪽 몸만 남았으니, 32살의 젊은 나도 그 시작은 두려웠다. 맘껏 재활을 하고 싶어도 이미 한번 죽었다 살아난 몸이다 보니, 이상과 현실의 차이처럼 늘 마음만 앞서 가고 마비된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그래서 퇴원 후 바로 1년간을 보호자의 팔을 잡고서 택시를 타고는 40분이나 걸리는 병원에 가 재활치료와 손 작업치료를 받았다. 젊기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그러나 워낙 마비 정도가 심하고, 아무런 감각도 없다보니 전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아 결국 괜한 노력과 시간 그리고 비용만 날리는 듯 해서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 즈음 어느 정도 건들거려도 잘 닦인 평지는 간신히 걸을 정도가 되었기에, ‘그래도 다시 한번 해보겠다’는 여러 날의 고민 끝에 내린 계산이 날 집앞 공원으로 이끌었다. 물론 이번에도 보호자를 대동하고 말이다. 그리고 처음 간 공원은 5분 걷다가 3분 쉬며 걷기만 했다. 힘들어 숨도 찼고, 땀도 마비된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하기야 마비되고 5년까지는 뜨거운 국물만 먹어도 마비된 이마에서 땀이 흘러 넘쳤다. 하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2년 가까이 병원에 가는 것 외에는 거의 집안에서만 있었기에 말이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잘 걷는다. 가만 있어도 아프고 힘든 것을 알기에, 그동안 마비된 나를 120%의 노력으로 채찍질하며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씨 좋은 날이면 하루 5시간씩 공원을 쏘다니며 혼자 운동했다. 이제 2시간 쯤은 쉬지 않고도 걸을 정도가 되었다. ‘아무나는 안 되지만 도전하는 누구나는 결국 다 걷게 되는 병’이 바로 이 뇌졸중이었다. 물론 내가 아는 그 마비는 참 느리게 나았지만, 그래서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긴 세월을 재활하는 동안 나는 참 자주 울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삐뚤어진 내 얼굴에 속상해 했고, 또 나름 열심히 재활해도 표시가 나지 않아 절망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방향을 잃고 힘들어 할 때면 남편은 늘 어둠을 밝히는 등대가 돼 주었다.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고, 지금도 많이 나았다며 내 힘든 재활을 알아 주었다. 그리고 같이 외출하거나 공원산책을 할 때마다, 이상하게 생긴 날 자꾸 쳐다보는 사람들 시선에, 심지어 우릴 한 번 보고 뒤돌아 두 번 보면서까지 수군대는 사람들에 힘들어 할 때면, ‘저들은 한번도 아파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저들 주위에 뇌졸중으로 아픈 사람이 없어 몰라 그런다’고 되려 이해를 구했다. 그러면서 너처럼 몸과 얼굴이 삐뚤어진 것도 불편한 장애이지만, 사실 사람들이 흘깃흘깃 쳐다보는 건 똑같으니 키 작은 것도 너무 큰 것도 장애고, 뚱뚱하거나 마른 것도 심지어 코 큰 것도 장애라며 웃는 것도 어색한 날 웃겨 주었다. 결국 ‘타인에게 숨기고 싶은 콤플렉스’는 전부 장애라며 날 위로한다. 따지고 보면 우리 사는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 서로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느새 나는 그렇게 몸과 맘이 같이 회복되고 있다. ‘난 단지 몸만 불편한 사람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우리 삶 자체가 자고 일어난 아침이면 항상 새로운 날이듯, 목표와 희망이 있는 시작에는 더 이상 늙고 젊음이나 장애조차도 문제되지 않음을 이젠 알았기 때문이다. 내 하루는 내 꿈으로 향하는 소중한 계단이기에 하루하루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고 있다. 지나온 세월이 그렇듯 노력하는 만큼 내 모습은 바뀌어 갈 테니까. 오히려 이제 변하는 내 모습에 짜릿한 성취감마저 느껴지는 삶이니까. 매일매일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긴장하는 모습이란 세상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니까. 오늘도 느리지만 착실하게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본다.